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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네시주 의회는 1822년에 잭슨을 대통령후보로 지명하였다. 또한 다시 그를 연방상원의원으로 선출하였다. 1824년까지 민주공화당은 유일하게 제 기능을 하는 미국의 국민정당이었다. 이 당의 대통령후보는 비공식적인 간부회의에 의해 선출되었으므로, 이를 불평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그리하여 1824년에는 민주공화당 소속 하원의원 대부분이 간부회의를 불참한 가운데, 회의의 출석자들은 윌리엄 H. 크로퍼드 재무장관을 대통령 후보로, 앨버트 갤러틴 전 주프랑스 공사를 부통령 후보로 지지하였다. 그러자, 한달 뒤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열린 민주공화당 당원집회는 “비공식적인 간부회의의 후보 선출은 ‘국민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그(크로퍼드)가 보통의 민주주의 후보였다고 속여, 미국 국민에게 확신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바램’일 뿐이라고 결정한다”고 선언하고, 잭슨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이에 대해 갤러틴은 잭슨을 ‘정직한 자들과 군사적 영광을 숭배하는 자들의 우상이지만, 무능하고 군인으로서의 습관이나 법률과 헌법의 조항을 습관적으로 무시하는 자세는 직무에 완전히 부적격하다’고 비판하였다.
결국, 대통령 선거에는 잭슨, 크로퍼드에 더하여, 국무장관인 존 퀸시 애덤스 및 하원의장 헨리 클레이 시니어가 후보로 출마하였다. 잭슨은 일반투표에서 최다표를 획득하였으나, 과반수에는 이르지 못했다. 선거인단 투표에서도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하여, 대통령의 선출은 하원에 위임되었다. 그 결과,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는 바, 이는 클레이가 자신은 애덤스를 지원한다고 선언하였기 때문이었다. 잭슨의 지지자들은 그 결과를 ‘부정한 거래’라고 규탄하였다. 대통령에 취임한 애덤스는 클레이를 국무장관에 임명하였다. 그렇지만, 잭슨의 패배는 그의 정치적인 신임을 높여 주었다. 많은 유권자가 ‘민중의 후보가 동쪽의 부정한 귀족에 의해 약탈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잭슨은 1825년 10월에 상원의원을 사퇴하였지만, 여전히 대통령의 자리를 모색했다. 테네시주 의회는 다시 잭슨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잭슨은 부통령 존 C. 칼훈, 상원의원 마틴 밴 뷰런, 토마스 리치(Ritchie)를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였다. 특히, 밴 뷰런과 리치는 앞선 선거에서는 크로퍼드를 지지했던 바 있다. 밴 뷰런은 필라델피아와 리치몬드의 친구들로부터의 조력을 얻어, 옛 공화당을 되살려, ‘민주당’이라고 하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민주당의 결성에 의해 정당에 의한 경쟁을 복원하고,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어 나갔다. 잭슨 진영은 애덤스를 솜씨 좋게 격파했다.
선거전 동안, 애덤스 진영은 잭슨을 jackass(수당나귀, 멍청이)라 불렀다. 잭슨 자신은 이 호칭을 좋아하였고, 역으로 이를 이용하여, 잠시 수당나귀를 상징으로 사용하였다가, 그 후 중단하였다. 그렇지만, 풍자만화가 토마스 나스토 가 후에 이를 보급하여, 당나귀는 민주당의 상징이 되었다.
선거전은 사생활의 폭로 등 노골적인 네거티브 전략(Negative campaigning)으로 시종일관하였다. 양 후보 모두 개인적으로는 그런 전략이 아니었지만, 지지자들은 그런 전략을 조직화하여 행하였다. 양 후보 모두 언론을 통해 수사적인 말로 공격하고, 잭슨의 부인 레이첼 여사가 중상모략되기에 이르자, 폭로전은 절정에 달했다. 레이첼은 잭슨의 취임전인 1828년 12월 22일에 급사하여 크리스마스 이브에 매장되었다. 잭슨은 자기를 모욕한 자는 허용하였지만, 처를 공격한 자는 결코 용서하기 않는다고 말하였다.
선거는 전쟁의 영웅으로서 지지를 얻은 잭슨이 승리하였다.
잭슨은 자기자신의 정치가로서의 정체성을 서민의 편에 두고, 이미지를 형성하였다. 그는 백악관의 앞에서 치즈를 놓아두고 민중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백악관의 견학 여행을 기획하였는데, 그의 대통령 취임의 축하 연회에서 민중의 지나친 행동이 수습되지 않는 장면도 있었다.
한편, 그는 원주민이나 흑인을 차별하는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원주민 이주법 제정과 서명(1830년 5월)으로 원주민을 머나먼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강제로 이주하게 했다. (→눈물의 길) 또한, 잭슨 자신은 테네시주의 플랜테이션에서 100명 이상의 흑인 노예를 소유하고 이들을 혹사시켰다. 잭슨 시대까지는 백인남자 보통선거제가 확립되어 있었고, 그 시대는 잭슨 민주주의라고도 불린다. 또한, 관리의 상당수를 교체하여 자신의 지지자들을 관리로 임명한 엽관제를 도입하였다. 당시 이 정책이 독직 구조를 혁파한다고 생각했었고, 이것이 관례였다.
거대 정부를 바라지 않은 잭슨은, 일찍이 정부가 설립한 미합중국 제2 은행을, 주마다의 독자재정을 박탈함과 함께 서민의 이익에 따르지 않는 것이라며 이를 적대시하여,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폐지를 위해 힘썼다.(그의 유명한 발언으로 “그 은행이 날 죽이려 하지만, 내가 그것을 없앨 것이다.(the bank is trying to kill me, but I will kill it)”) 잭슨은 연방의회가 인정한 제2 은행의 특허갱신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그때까지 거부권은 명확히 위헌의 가능성이 있는 때에 행사하는 것이 관례여서, 잭슨의 행동은 혁신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연방대법원도, 연방의회도 제2은행은 합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의회는 이에 반발하여, 이름난 상원의원이 연설을 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거부권을 뒤짚기에 필요한 3분의2의 표를 반잭슨파는 확보하지 못해, 제2 연방은행은 연방의 보증을 잃고,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그 뒤에도 잭슨의 여러가지 정책에 의해 파산에 내몰리게 된다.
이런 일로도 알 수 있듯이 잭슨은 연방에 대한 주(州)의 권리를 중요시하는, 남부 출신의 주권(州權)주의자였다. 잭슨 시대의 연방정부는 균형재정을 유지하고, 부채를 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연방법을 주의 권한으로 무시하고, 주는 합중국으로부터 자유롭게 이탈할 수 있다는 운동이 일어나자(무효화의 위기), 잭슨은 이 움직임을 강하게 견제하였다. 결과적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이반은 와해되었지만, 그 시대의 이러한 운동은 훗날 에이브러햄 링컨 시대의 남부 여러 주의 연방이탈 시의 운동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1832년 3월, 보호구역에 있던 세미놀 족 수장들이 미국 정부와의 협상을 위해 소집되었다. (패인즈 랜딩 조약 참조) 7월에는 검은 독수리라고 불리는 인디언 추장이 백인마을을 습격하였다.
잭슨 정부의 2기(期) 동안 외교에 있어서는 대체로 평온하였다. 가장 심각한 위기는 프랑스와 있었는데, 잭슨이 임기를 개시한 1829년, 나폴레옹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미국 선박들의 나포에 따른 약탈에 보상 요구가 미국과 프랑스 정부 간의 긴장 관계를 야기하였다. 20여년전, 나폴레옹 치세의 프랑스 해군이 미국 선박들을 나포하고 어떤 보상이나 사법적 절차도 없이 강제 노역을 시키고서는 스페인의 항구로 그 배들을 끌고 갔었다. 국무장관 마틴 밴 뷰런에 따르면, 미국과 프랑스 간의 관계는 "희망이 없었다." 그런데 이를 잭슨 정부의 주(駐)프랑스 공사 윌리엄 캐벨 리브스가 외교를 통하여, 배상금으로 2500만 프랑(500만달러)를 지급하는 배상금 조약에 프랑스가 서명(1831년 7월 4일)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내부의 재정 결핍과 정치적 어려움으로 납부를 연체하였다. 프랑스의 루이 필리프 1세와 그의 내각은 프랑스 대의원(代議院)을 비난하였다. 1834년까지도 프랑스 정부가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자, 잭슨은 분노하였고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1834년 12월 1일자, 메시지를 통한 제6차 국정 연설에서 프랑스 정부의 납입 연체를 단호하게 질책하고, 미연방정부는 프랑스 정부에 단단히 실망했다는 점을 표명하고, 프랑스에 대한 무역 보복을 승인해 줄 것을 의회에 요청하였다. 이와 같이 잭슨은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취하였고, 휘그당은 그의 호전성을 비웃었다.
잭슨의 성명에 모욕감을 느낀 프랑스인들은 사과를 요구하였다. 1835년 12월 7일자, 메시지를 통한 제7차 국정 연설에서 잭슨은 사과하기를 거절하면서, 그는 프랑스인들에 대해 좋은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의도는 평화적인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그는 조약의 배경이 되는 역사에 대해서 길고도 자세하게 설명하였고, 또한 프랑스 정부가 의도적으로 지급을 지연하는 것이라는 그의 신념도 설명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잭슨의 교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1836년 2월에 마침내 보상금을 지급하였다.프랑스 뿐만 아니라, 잭슨 정부는 덴마크, 포르투갈, 스페인과의, 약탈에 따른 보상금 청구도 성공적으로 합의하였다.
큰 성과는 또 있었다. 전임자 존 퀸시 애덤스가 실패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잭슨 정부는 영국과의 무역 조약을 성공적으로 협상하였던 것이다. 영국의 총리가 교체되었고, 또 영국의 무역 정책이 자유무역주의로 나아간 것에도 성공요인이 있었다. 이 조약으로, 미국의 상선들이 서인도 식민지들에서의 무역을 재개하였다. 또한, 잭슨 정부의 국무부는 활발히 움직여서 러시아 제국 · 스페인 · 오스만 제국 · 라따나꼬신 왕국(1833년)과의 무역 조약의 체결도 완수하였다. 라따나꼬신 왕국과의 무역 조약은 미국이 아시아 국가들과 맺은 최초의 조약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수출은 75%, 수입은 250% 증가하였다. 1832년부터 1834년까지 응우옌 왕조 · 라따나꼬신 왕국 · 머스캣에서의 임무를 수행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특사 에드먼드 로버츠는 국무장관 루이스 맥레인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 보고서에서 그는 "조선 및 북부 중국과 통상을 여는 길은 먼저 일본과 조약을 맺는 것"이라고 하였으나, 몇 년 후 그가 병사하는 바람에 일본과의 교섭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로서 잭슨 정부는 청나라 · 에도 막부와의 무역을 개시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잭슨 정부는 남아메리카에서의 영국의 존재와 힘을 꺾지 못했다. 또한 멕시코로부터 텍사스를 500만 달러에 매입하려던 시도도 실패하였다. 주(駐)멕시코 임시대리대사 앤소니 버틀러는 텍사스를 무력으로 점령하자고 제안했지만, 잭슨은 이를 거절하였다. 버틀러는 잭슨의 집권 말기에 교체되었다.
법률 및 정치 경력 이외에도 잭슨은 노예주, 농장주 및 상인으로도 성공했다. 1803년에 그는 갤러틴에 최초의 잡화점을 건설했다. 1804년 내쉬빌 데이빗슨 카운티 근처에 2.6km2 면적의 허미티지 농장을 구입했다. 그 후 1.5km2를 추가하여 결국 425ha에 이르는 농장으로 성장했다. 주요 작물은 면화로 흑인 노예를 이용하여 재배하였다. 잭슨은 9명의 흑인노예에서 시작하여 1820년에는 44명, 이후 150명의 흑인 노예를 소유했다. 잭슨은 생애 최대 300명의 흑인(혼혈 포함) 노예를 소유했을 가능성이 있다.
잭슨은 1818년에 차카소 네이션과 토지 판매 협상을 통해 테네시 서부의 토지 투기를 했다. 또한 1819년 멤피스 설립을 한 3명의 투자자 중 한 명이었다. 앤드루 잭슨은 대통령이 되기까지 13번 결투를 하였다. 이 대가로 사망할 때까지 그의 몸에는 두 개의 총탄이 박혀있었다. 하나는 1819년 친구와 도박 빚을 놓고 싸우다가 생겼고, 두 번째 총탄은 1835년 리처드 로렌스라는 페인트공이 쏜 총에 맞았으나 총알이 급소를 비켜갔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이 사건은 미국 대통령 역사상 최초의 암살 기도였다. 현재 통용하는 미국의 20달러 지폐에는 그의 초상화를 새겼다.
![]() | 제7대 미국 대통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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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임 존 퀸시 애덤스 | 1829년 3월 4일 ~ 1837년 3월 4일 | 후 임 마틴 밴 뷰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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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존 퀸시 애덤스 | 미국의 국가 원수 1829년 3월 4일 ~ 1837년 3월 4일 | 후임 마틴 밴 뷰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