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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0월 북베트남으로부터 20만 명에 이르는 난민들이 내려왔으며 미국의 지원으로 정치적 기반을 형성하여 많은 피난민들이 남부로 내려오도록 장려하였다. 1956년 통일 선거에서 이길 수 있도록 특히 가톨릭 신자의 이주를 장려해 북베트남의 가톨릭 신자 60%가 남베트남으로 이동했다.
그러는 사이 보대제의 베트남은 극심한 혼란과 북베트남과의 분쟁을 일으켜 약화가 되었고, 프랑스도 보대제가 쫓겨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당시 남베트남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 조직이던 프랑스 원정군을 대신해 남베트남 육군 부대가 조직되었다. 그는 정변을 일으켜 선거를 결행한다.
1955년 10월 23일 베트남의 미래를 결정하는 국민 투표가 열려 남베트남에서는 45만 명의 유권자가 참가하였고 사이공에서는 98.2%의 높은 투표율로 60만 5025표가 등록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압박으로 북베트남이 굴복하면서 국민 투표의 결과를 보류되고 그 사이 1955년 10월 26일 국민 투표로 보대제를 몰아내고 국가 최고의 원수가 되면서 남베트남 공화국이 선포되고 분단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공산주의를 극도로 혐오하였던 그는 지주층과 로마 가톨릭교회 세력, 해외 유학파 출신 지식인들, 군부, 경찰 세력을 기반으로하여 강력한 반공주의정치를 폈다. 또한 학문, 예술 작품에 대한 검열을 강화하여 반체제, 반정부성이거나 지나친 자유를 외치는 서적, 학문, 작품에 대한 검열과 탄압, 단속 정책을 펴 나갔다.
집권 초기 여러 파벌의 공격과 정쟁으로 혼란에 처하여 위태로웠다. 남베트남은 반정부집단과 공산주의 외에도 왕정복고파, 여러 지역, 학벌, 파벌 들로 얽힌 정치당파들로 분열되어 있었고, 그는 자신의 친족들과 측근들을 집중 등용하여 일종의 측근, 가신 세력을 형성하였다.
1957년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워싱턴 D.C.를 방문했고 이로써 미국과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졌다.
또한 독재정치의 특징인 막강한 족벌인사를 동원해 동생들은 비밀 경찰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다른 형제는 영국 대사, 쿠양빈의 대주교 등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외국 은행에 널린 재산과 라오스를 통한 불법 밀수 등을 이용해 미국과 무역을 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농장, 토지, 부동산, 임대 주택 및 고무 농장 등을 지원하여 교회를 지지세력으로 만들었다.
동생 응오딘누의 아내이자 사실상의 영부인인 마담 누는 가톨릭 가치관에 따라 간음, 간통과 관련된 법률을 제정하고, 군대에서는 응오딘지엠의 치세기 동안 5만 ~ 7만 5000명에 달하는 공산주의자들을 처형하여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였다.
1957년 응오딘지엠은 경제 박람회 방문 중 가까운 거리에서 한 공산당 간부의 저격을 받았으나 살아남았고 1960년 쿠데타 미수 사건까지 발생했다.
1962년 2월 22일 미군은 독재자 응오딘지엠을 죽일 수만 있다면 상황을 더 유리하게 만들 수 있다는 발언을 했고 공군에 의한 대통령궁 폭격 사건이 발생했지만 응오딘지엠은 살아남았다.
1957년 응오딘지엠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을 방문해 자유 세계의 지도자라고 환영받았고 미디어와 반공주의 신념으로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의 여당에 초청받았다.
1953년과 1957년에는 대한민국을 방문하였고, 1958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11월 6일에 남베트남에 도착하여 월남공화국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전으로 응오딘지엠 대통령을 예방하고, 남베트남 공화국 국회에서 반공과 두 나라간의 교류협력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또한 중화민국의 장제스와도 수시로 교류, 협력을 다짐하였다.
집권 초기에는 강력한 반공주의 덕에 미국의 지지를 받았지만 공산주의 봉기를 부추긴다는 이유로 수많은 불교도들을 투옥, 처형하자 미국도 지원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는 지주층과 기독교 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해 집권 초기의 공약인 토지개혁 실시 공약을 이행하지 않고 공산주의와 베트콩 이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1946년 ~ 1954년에 프랑스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기간 동안 남베트남에서는 지주가 토지를 거의 차지해 50 ~ 70%에 달하는 토지를 차지하였고 메콩강 유역에서는 0.025%의 지주가 전체 토지의 40%를 차지했다.
이 때문에 토지 문제를 둘러싸고 농민과 지주들 사이의 갈등이 발생하고 1956년 미국의 압력으로 토지를 1.15km로 제한하는 법령을 발표했지만 대부분의 지주는 재산을 가족에게 양도해 이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국과 타이완인들은 한도의 30배를 넘는 토지를 면제받았고 가톨릭 교회는 1500km에 달하는 토지를 차지하였다.
그 결과 남베트남의 토지 중 단 13%만이 분배되고 세입자 10%가 높은 비용으로 토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인구의 10%가 토지 55%를 차지했다.
응오딘지엠은 70 ~ 90%의 베트남인들이 믿는 불교를 차별하였다. 그는 공공 서비스와 국방에 걸쳐 오로지 가톨릭 교인들에 대해서만 토지 할당, 사업 호의, 세금 감면 정책 등을 펼쳤으며, 베트콩 게릴라를 격퇴하기 위해 마을별로 총기를 배포할 때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는 경우 배급하지 않았다. 어떤 지역에서는 군대의 포격으로 불교 절들이 파괴, 철거되고, 몇몇 불교 마을 역시 철거되었다. 가톨릭 교회 신자들은 남베트남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했고, 토지 개혁에서도 면제되었다. 공산주의 봉기를 부추긴다는 이유로 수많은 불교도들을 탄압 투옥, 처형하자 미국 내 여론은 악화되었고 미국은 그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게 되었다.
1963년 남베트남 정권과 불교간의 관계는 당연히 최악으로 치달았다. 1963년 5월에 응오딘지엠의 형이 쿠양빈의 대주교로 임명되자 석가탄신일을 금지했고 승려들에 대한 총격 사건이 발생해 이에 틱꽝득 승려가 분신으로써 불교 탄압에 항의하는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6월 3일 쿠양빈에서 시위대가 댐으로 이동하던 중 화학 공격을 받았고, 결국 6월 11일 세계를 경악시킨 불교 승려 틱꽝득(Thich Quang Duc)의 분신 자살 사건이 발생했다.
틱꽝득의 분신 자살은 세계적으로 보도되었는데 이를 촬영한 말콤 브라운은 퓰리처 상을 수상했고, 국제사회에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한 여론은 악화되었다. 틱꽝득의 분신 자살은 또한 쿠데타의 도화선이 되었다. 뒤이어 8월 사이공에 있는 싸로이 사찰을 무자비하게 공격해 30명을 살해하고 민간인 200명과 승려 1400명을 체포했다.
이 기간 동안 마담 누는 틱꽝득의 분신 자살은 "바베큐"로 비하하는 발언을 하고 세간의 지탄을 받았다. 그리고 시민단체와 무력 충돌을 벌이는 등 사회 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쿠양빈의 대학교가 폐교당하고, 학생들은 체포됐으며 공무원들의 자녀 1000명이 재교육 센터로 보내졌다. 뒤이어 외무장관 반 마누가 종교 순례를 하려다가 체포되어 사임했다.
사회 불안이 악화되는 가운데 응오딘지엠 자신이 직접 장군으로 임명한 즈엉반민 장군은 응우옌칸, 응우옌까오끼, 응우옌반티에우, 돈 댓 딘 등의 동료들을 포섭하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어 해병대 2개 대대와 공수부대까지 가담시켜 M-113 병력 수송차량 중대의 지원을 받는 해병대대는 쿠데타 선봉으로 제1기동부대 역할을 맡고 제6공수대대와 훈련대는 12대의 장갑차량 지원을 받아 제2기동부대 역할을 맡고 응우옌반티에우의 경호 부대인 제5사단 7연대 2대대와 9연대 2대대는 제3기동부대 역할을 맡아 사이공 장악을 하기로 했으며, 응우옌반티에우는 곡사포로 대통령궁을 공격하기로 했다. 이로써 쿠데타 세력은 약 40대의 탱크와 수많은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1963년 11월 1일 쿠데타는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어 남베트남의 군 고위장성들이 체포되고 쿠데타 세력은 대통령궁을 공격해 대통령궁 경호 부대와 전투를 치르고 미국으로의 망명을 거부하던 응오딘지엠은 11월 2일 새벽 쿠데타 세력이 총공세를 펼치는 사이 동생 응오딘누와 함께 비상 통로를 통해 중국인 거주 지역인 쩌런으로 도주했다.
하지만 결국 오전 6시 대통령궁을 완전히 장악한 쿠데타 세력에게 항복했고 ���갑 차량에 호송되던 중 동생 응오딘누와 함께 쿠데타 군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전임 (초대) | 제1대 남베트남의 총통 1955년 10월 26일 ~ 1963년 11월 2일 | 후임 즈엉반민 |
전임 구엔 판 부 록 판 후이콱 (직무 대행) | 남베트남 베트남국의 수상 1954년 6월 16일 ~ 1955년 10월 26일 | 후임 (남베트남 정부 수립) |
전임 바오다이 | 베트남의 국가원수 1955년 4월 30일 ~ 1963년 11월 2일 | 후임 즈엉반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