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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솔리니는 1919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실패한 좌파 민족주의를 고수하지 않고, 자신의 운동을 정치적 기회로 활용하는 편을 택했다. 1920년에서 1922년 사이 그의 연설과 강령에서 무솔리니가 점차 우파 쪽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초기 파시즘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사상은 전쟁과 제국주의에 대한 거부였다. '참호(에서 얻을) 반전주의'는 전투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던 당시 퇴역군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신념이었다.
이탈리아 산세폴크로 광장에서 발표한 강령은 (피우메와 달마티아 해변에 대한 이탈리아의 권리를 주장하기는 했지만) '각 나라의 영토를 보전하는 것이 최우선의 원리'라는 국제연맹의 원칙을 받아들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탈리아의 기성 우파, 반왕당파 및 공화정 세력은 귀족과 재벌들의 이권을 수호하고 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유지하였으며, 이들을 좌파로 규정, 위험성을 경고하는 수준에서 머물렀다.
1919년 6월의 강령에서는 직업적 군대를 방어적 의미의 민병대로 대체하고 무기 및 군수품 공장을 국유화한다는 파시스트들의 주장은 그대로였지만, 국제연맹 이야기는 사라졌다. 1921년 발표한 강령에서 달라진 파시스트당은 국제연맹을 편파적이라고 비판하고, '지중해 라틴 문명의 보루'이자 이탈리아적인 것(Italianita)의 보루로서 이탈리아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이탈리아의 식민지 개척과 대규모 상비군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무솔리니는 자랑스러운 이탈리아, 로마 제국의 옛 영광, 반국가 행위자 처벌 등을 주창했다. 이러한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들의 주장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대중들의 급격한 동의를 얻으면서 기성의 우파 정당을 대체하여 집권당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일본의 제국주의는 일본이 나치 독일을 보고 군국주의와 합친 혼종이다
대한민국의 파시즘은 해방 이후 이범석과 안호상이 창설한 조선민족청년단과 일민주의에 의해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국민당 스타일의 파시즘 강령을 모방하여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청년교육운동에 주력했다. 이들은 결국 미군정의 압력에 의해 해산되었으나, 족청의 주요 인사들은 이승만 정부와 협력하여 재헌헌법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강준만은 박정희 시대의 파시즘적 성격에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박정희의 유사 파시즘적 체제는 1972년 민주제도를 파괴하고, 영구집권 기반을 확립한 '10월 유신'으로 성립했다. 박정희식 유사 파시즘은 '민족성 개조'라는 이름의 국민의식 개조운동과, 공포와 폭력이라는 물리적 탄압의 두 가지 수단을 통해 공고해졌다. 박정희는 그해 10월 17일 "민족의 지상 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뒷받침하기 위해 한국적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한다"는 구실로 비상 계엄을 선포하고, 이른바 10월 유신을 통해서 파시즘 체제의 시동을 걸었다. 유신헌법은 그 파시즘 체제의 법적 표현이었다. 의식개조운동은 새마을운동과 '이순신 성웅화' 작업이 표본이다. 농촌 새마을 운동에서 시작해 도시-공장-학교 새마을 운동으로 번진 이 운동은 "10월 유신과 영구 집권에 필요한 대중동원 수단"이자 "유신이념과 연결된 정치적 국민운동"이었다. 현충사 성역화 사업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에게 이순신은 "'나'는 없고 '국가'와 '민족'만 있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멸사봉공의 정신"이었다.
파시즘은 경제 불황, 대량 실직, 독재적 권력자와 맹목적인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쇼비니즘, 외국인이나 소수민족을 차별하는 인종 차별 등과 함께 나타난다는 특성이 있다.
파시스트 운동의 여러 분파 중 일부의 흐름은 인종주의가 핵심 요소로 자리잡았으나, 인종주의가 파시스트 운동 일반에서 필수적인 요소인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크다. 1934년 저널리스트 에밀 루트비그가 주최한 인터뷰에서 베니토 무솔리니는 "어딜가나 순수한 인종은 없으며, 순수한 인종이 없는 상태에서 인종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며 나치의 과격 인종주의를 비판했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입장은 매번 바뀐 적이 많았으므로, 파시즘이 '인종주의'를 포함하지 않는지는 의문이다.
파쇼라는 표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독일, 이탈리아, 일본, 불가리아 등)이 패망한 이후 정치적 조롱의 표현이 되었다. 현대 정치 담론에서 주로 사회주의 등 좌파를 주축으로 하는 일련의 정치세력은 파시즘을 악마(惡魔)로 취급한다. 애국심이 과도하면 파시즘으로 돌변한다는 점에서 비판의 우려가 존재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파시즘 진영은 초토화 되었지만, 이탈리아에서 다시 신-파시즘 운동이 일었다. 현재 유사 파시스트와 현대에서 일컫는 모든 파시즘은 이 네오파시즘에 속한다. 네오파시즘은 반자본주의 가치가 사라진 파시즘이다. 즉, 네오파시스트들은 전통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혐오하며, 경제적으로는 자유경쟁 체제, 정치·사회적으로는 권위주의적인 상태를 지향한다. 이는 반자본주의, 반공산주의적이었던 초기 파시즘과는 또 다른 형태이며, 공통점은 민족주의를 이용해 대중 독재를 합리화 한다는 점이다. 현재 이 네오파시즘 현상은 주로 쿠데타와 폭압적 독재를 경험한 국가에서 자주 나타난다. 쿠데타를 경험한 적이 거의 없는 유럽이나 북아메리카에서는 네오파시즘의 또 다른 형태인 네오나치즘으로 나타난다. 이 둘의 차이점은 인종주의인데, 네오파시즘은 비-인종주의적이고, 네오나치즘은 인종주의적이라는 것이다. 즉, 네오나치즘은 네오파시즘의 극단된 형태라고도 볼 수 있으며, 네오파쇼적 행동 양상에 극단적 인종주의가 포함되어 있다면, 네오나치라고도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 인터넷 상의 일부 사이트 등이 외국인혐오 성향을 가지고 있으나 그렇다고 특별히 국수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거나 민족 사회주의 사상에 영감을 받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까지 네오나치라고 부를 수 있는 정치세력은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