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류 | 중형전차 |
|---|---|
| 개발국가 | 소련 |
| 개발사 | 모로조프 설계국 |
| 배치년도 | 1940년 ~ 1960년대 (소련) 1950년대 ~ 2010년대 (다른 국가) |
| 역사 | |
| 개발년도 | 1937년 ~ 1940년 |
| 생산기간 | 1940년 ~ 1958년 |
| 사용국가 | 소련 외 39개국 |
| 사용된 전쟁 | 제2차 세계 대전 6.25 전쟁 외 다수 |
| 개량형 | T-34-57, T-34-76, T-34-85 |
| 생산 대수 | 84,070 T-34: 35,120 T-34-85: 48,950 |
| 일반 제원 | |
| 승무원 | 4명 |
| 길이 | 6.68 m |
| 높이 | 2.45 m |
| 폭 | 3.00 m |
| 중량 | 26.5 t |
| 공격력 | |
| 주무장 | 85mm ZIS-S53 전차포 (T-34-85 기준) 76.2mm F-34 전차포 (T-34/76 기준) |
| 부무장 | 2 × 7.62 mm DT 기관총 |
| 기동력 | |
| 엔진 | 12기통 38.8L 디젤 엔진 V-2-34(500HP) |
| 마력 | 500 마력 (370 kW) |
| 출력/중량 | 17.5 마력/t |
| 현가장치 | 크리스티 현가장치 |
| 노상 속도 | 53 km/h |
| 기동 가능 거리 | 400 km |
| 방어력 | |
| 전면 장갑 | 45 mm (1941년형 기준) |
| 측면 장갑 | 45 mm (1941년형 기준) |
| 상부 장갑 | 45 mm (1941년형 기준) |
T-34는 소련의 중형전차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도입되어 이후 소련의 전차 개발과 제작 역사에서 지속적이고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처음 도입될 당시부터 T-34는 화력, 기동성, 방호, 접지력 등이 모두 뛰어났고 76.2mm 고속전차포를 채용하여 상대에 비해 우월한 화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경사장갑은 현대의 대전차무기도 몇몇은 여전히 관통이 어려울만큼 방호 능력이 좋았다.
T-34는 1941년 처음 전선에 배치되었다. 이를 마주한 독일의 파울 루트비히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장군은 T-34를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전차"라고 하면서 당시 존재하던 독일의 전차들을 압도한다고 인정했다. 이후 소련이 차세대 전차를 개발하며 T-34는 퇴역하기 시작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차 가운데 영향력이 큰 전차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T-34는 소련의 주력 전차였다. 1944년까지 T-34의 디자인은 거의 변하지 않았고 이후 화력 보강을 위해 주포의 구경을 키운 T-34-85가 제작되었다. 소련은 상대적으로 값싼 생산 비용과 짧은 생산 기간을 앞세워 T-34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전선에 투입하였다. 전쟁 기간 도안 소련이 제작한 T-34는 모두 8만여 대에 달한다. 이 때문에 전투 중에 많은 손실이 있었음에도 지속적으로 전선에 전차를 공급할 수 있었다. 이 수량은 전후 20세기 후반에 지속적으로 생산된 T-54/T-55가 앞지르기까지 소련에서 생산된 전차 가운데 가장 많은 물량이었다. 한편 손실 역시 가장 커서 제2차 세계 대정 동안 총 44,900대가 파괴되었다. 소련의 핵심 전략 가운데 하나였던 종심작전이론은 T-34의 투입 이후 실제로 실현될 수 있었다.
T-34의 성공적인 운용으로 소련은 이후 개발된 전차에서도 T-34의 설계 개념을 이어갔다. 후속 모델인 T-54/T-55 시리즈뿐만 아니라 현대 전차에 속하는 T-62도 T-34의 디자인에서 영향을 받았다.
T-34의 개량형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세계로 수출되었다. 이 가운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인민군도 있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직전 조선인민군은 총 242대의 T-34-85를 보유하고 있었다.

1939년 당시 소련의 전차는 T-26 보병전차와 빠른 속도를 위한 경전차인 BT 전차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전간기 유럽 여러 나라의 전차 운영교리에 따른 것으로 보병전차는 보병과 함께 움직이며 화력을 제공하는 느린 속도의 전차였고 별도의 기동성 있는 전차 운용을 위해 장갑이 얇아 가볍고 빠른 경전차가 쓰였다. T-26과 BT 전차는 모두 외국의 전차 설계를 모방하여 소련에서 제작한 것이었다. T-26은 영국 빅커스 6 톤을 기반으로 제작되었고 BT 시리즈는 미국의 존 월터 크리스티가 설계한 디자인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1937년 붉은 군대는 BT 시리즈를 대체할 새로운 전차를 개발하기로 하고 개발팀의 수장으로 미하일 코시킨을 임명하였다. 코시킨은 하르코프 코민테른 기관차 공장에서 A-20의 시제품을 제작하였다. A-20은 장갑차였던 BA-20의 엔진을 개조하여 사용하였고 20 mm의 장갑과 45 mm 주포를 장착하였다. 시제품 제작이 끝나고 양산형 설계 단계가 되자 이를 담당한 콘스탄틴 셀판은 인화성이 낮아 피탄시 보다 안전한 디젤 연료를 사용하도록 엔진을 바꾸었고 궤도가 파손되더라도 주행이 가능하도록 8×6의 타이어 기반 가변 구동 장치를 갖추었다. 이 기능은 전차의 신뢰도가 낮았던 당시로서는 유지 보수에 큰 장점을 주었고 도로 주행 시 시속 85 km의 고속 주행이 가능하도록 했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별다른 이점이 없었기에 1937–38년 사이 궤도 설계가 개선되자 결국 폐기 되었다. A-20은 피격시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도탄을 유도하는 경사장갑을 도입하였다. 경사장갑은 직격시 수직장갑보다 포탄이 뚫고 들어가야 하는 장갑의 깊이를 더 크게 만들고 직격되지 않을 경우 포탄이 빗겨나가도록 한다.
일본제국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과 국경 분쟁을 겪고 있던 소련은 1938년 7월 하산호 전투와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 대규모 전차를 투입하여 일본군과 맞섰다. 일본 제국 육군의 95식 경전차는 디젤 엔진을 사용하였지만 소련의 T-26 및 BT 전차는 당시 전차 설계에서 흔히 적용되었던 휘발유 엔진을 사용하였다. 이때문에 일본군이 몰로토프 칵테일을 던져 소련 전차에 명중시키면 전차가 불길에 휩싸이는 경우가 잦았다. 당시 소련은 용접 기술이 충분하지 않아 장갑판 사이에 작은 틈이 있었고 이 틈 사이로 화염이 엔진실과 전차 내부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소련은 부족한 용점 기술을 보강하기 위해 리벳을 사용하였지만 이 역시 취약점이 되었다. 방호력도 부족하여 소련 전차는 일본 95식 전차에 달린 37 mm 포는 저속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전차를 쉽게 파괴하였고 "다른 어떤 사소한 도발”만 있어도 전차를 잃었다. 적의 포탄이 전차의 장갑을 관통시키지 못하더라도 피탄 충격으로 리벳이 떨어져 나왔는데 이렇게 떨어져 나온 리벳은 전차 승무원을 사살하는 또 다른 탄환처럼 작용했다.

이 전투들 이후 코시킨은 실전의 문제점을 개선한 새 전차를 개발하기 위해 이오시프 스탈린을 설득하였다. 실제 전투에서 보병전차와 경전차의 구분은 크게 의미가 없었으므로 새로운 전차는 두 상황 모두에서 운용할 "범용 전차"이어야 하였고 충분한 방호력을 갖추어야 하였다. 이렇게 개발된 전차는 전면 장갑의 두께 32 mm에서 착안하여 A-32로 명명되었다. A-32는 L-10 76.2 mm 포를 장착했으며, A-20과 동일한 모델의 V-2-34 디젤 엔진을 사용했다. 1939년 쿠빈카에서 두 시제품에 대한 현장 검증이 있었다. A-32는 A-20보다 더 무거웠지만 동일한 기동성을 보였다. 코시킨은 시제품의 개량에 착수하여 전면 장갑의 두께를 45 mm까지 늘리고 늘어난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퀘도의 폭을 넓혔다. L-11 76.2 mm를 주포로 장착한 새 전차는 T-34로 명명되었다. 34란 숫자는 1934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해는 소련이 세르고 오르조니키제를 전차 생산 책임자로 임명하고 대량의 기갑 병력을 확보하기 시작한 해이자 코시킨이 새로운 개념의 전차 디자인을 구상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였다.
T-34에는 하산호 전투와 할힌골 전투에서 얻은 전차 운영의 교훈이 반영되었다. 장갑의 방호력을 높이면서도 기동성을 유지하고 높은 품질의 용접으로 강갑 사이의 틈을 매우고 리벳 디자인을 폐기하였으며 주포 화력의 중요성을 반영하여 대구경의 고속포를 도입하였다. 이로서 T-34는 이 모든 면에서 기존의 주력 전파였던 BT 시리즈와 T-26에 비해 뛰어난 성능을 보이게 되었다. 1940년 1월 2대의 T-34 시제품이 완성되었다. 시제 전차는 크렘린의 지도자들에게 선보이기 위해 하르코프에서 모스크바로 운행하였다가 다시 핀란드 접경의 만네르하임 선을 방문하고 민스크와 키예프를 거쳐 하르코프로 귀환하는 2000 km의 혹독한 장거리 주행을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구동계 결함이 확인되어 수정되었다. 전차는 강행군에 성공하였으나 이를 직접 운행한 개발자는 그러지 못하였다. 긴 여정 중에 미하일 코시킨은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T-34의 전면적인 대량 생산은 높은 생산비에 대한 우려와 기존 교리를 고수하는 군지휘부의 반대로 인해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나 핀란드와 벌인 겨울 전쟁에서 기존의 전차들이 같은 문제를 드러내며 속수무책의 상황에 놓이게 되고 나치독일이 프랑스 침공에 앞세운 독일 전차의 위력을 알게 되자 새로운 전차의 생산은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1940년 9월 첫 양산형 제작된 T-34는 이후 T-26이나 BT 전차와 같은 소련의 구형 전차를 모두 대체하게 되었다. 코시킨의 사망 이후 T-34의 생산 책임자로 동력계 개발 담당자였던 알렉산드르 모로조프가 임명되었다.
T-34의 양산은 여러모로 버거운 과제였다. 소련의 중공업 기술은 여전히 서유럽에 비해 뒤쳐져 있었고 T-34는 기존의 어떤 소련 전차보다 장갑이 무겁고 두터웠다. 생산 라인은 장갑 사이를 틈새없이 용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무선 통신 장비는 비용도 많이 들고 수량도 부족하여 모든 전차에 다 장착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중대 단위로 무전기가 지급되었고 중대 내에서는 깃발로 신호를 보냈다. 최초로 도입하였던 L-11 주포는 성능이 기대에 못 미쳐 바실리 그라빈이 설계한 T-34 전용 주포가 개발되었다. 소비에트 관료들은 높은 생산 단가 때문에 이렇게 개발된 F-34 76 mm 탱크포의 예산을 승인하지 않았지만 공장에서는 어떻게든 새로운 주포를 장착하였다. F-34 탱크포의 공식 승인은 독일과의 첫 교전에서 주포의 성능을 확인한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초도 생산 물량인 1940년형은 약 400대에 그쳤다. 1941년형은 F-34 포를 장착했고 9-RS 무전기가 적용되었으며 장갑도 더 두꺼워졌다.

T-34는 여러 공장에서 부분품을 나누어 생산한 뒤 하르코프에서 완성차를 제작하는 방식으로 생산되었다. 엔진은 하르코프에서 직접 제작되었고 주포는 레닌그라드의 키로프스키 공장에서 전기부품은 모스크바의 디나모 공장에서 제작되었다. 전차의 조립은 하르코프 183호 공장에서 시작하였으나 1941년 초 스탈린그라드의 트렉터 공장을 이용하였고 7월부터는 고리키의 크라스노예 소르모보 공장 112호에서 진행되었다.
| 형식 | 수량 |
|---|---|
| 경전차 | 14,508 |
| T-34 | 35,119 |
| T-34-85 | 29,430 |
| KV / KV-85 | 4,581 |
| IS | 3,854 |
| SU-76 | 12,671 |
| SU-85 | 2,050 |
| SU-100 | 1,675 |
| SU-122 | 1,148 |
| SU-152 | 4,779 |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벌여 소련을 기습 침공하였다. 독일국방군이 빠르게 진격해오자 소련은 전차 생산 라인을 우랄 산맥 동쪽으로 대피시키고 전차 생산을 지속하였다. 긴급하게 이루어진 이 조치는 관련 노동자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었고 물류와 군수 체계에도 큰 문제를 일으켰지만 책임자인 알렉산드르 모로조프는 숙련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이탈 없이 이전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했다. 이렇게 하여 체르진스키에 새로운 전차 생산 라인이 구축되어 스탈린 우랄 전차 공장 183호가 되었다. 키로프스 공장은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일어나기 불과 몇 주 전에 대피할 수 있었고 하르코프 디젤 엔진 공장과 함께 첼랴빈스크에 새로운 생산 라인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로서 첼라빈스크는 탱크의 도시라는 의미로 "탕코그라드"라 불리게 되었다. 레닌그라드에서 나온 노동자들은 우랄 공장과 새로 건설한 옴스크 공장으로 분산되어 배치되었고 그 외에 독일 진격로 상에 있던 여러 중소 공장들의 노동자 역시 이들 공장이 흡수하였다..
소련은 급박한 공장 이전으로 전차 공급에 차질을 빚었지만 스탈린그라드 인근의 공장을 주야 2교대로 돌리며 생산 수량을 만회하였다. 1941년 9월부터 가동된 스탈린그라드 공장은 철수가 이루어진 이듬해 9월까지 1년 사이에 전체 T-34 물량의 40%를 제작하는 놀라운 수율을 보였다. 그러나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공장이 치열한 전투에 둘러싸이자 상황은 절망적으로 변했다. 자재 부족에 생산은 원활치 않았고 주변 전장으로 도색조차 하지 못한 전차들이 공급되었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스탈린그라드는 1942년 9월까지 생산을 지속했다.
T-34의 설계에 결함이 있다는 점은 초기 생산부터 알고 있었지만 급박한 전쟁 상황에서 보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계 변경으로 인해 생산에 차질이 일어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1944년까지 소련의 기술자들은 보다 값싸고 빠르게 생산할 방법이 아니면 설계에 손대지 않았다. 변형이 이루어 진 공정은 용접과 장갑판 경화의 자동화와 같은 것들이었다. T-34의 1941년형 76.2 mm F-34 포의 경우 초기 861개의 부품이 설계되었지만 공정의 단순화를 위해 614개 부품으로 줄였다. 초기의 포탑은실내가 비좁아 전투에 지장을 주었다. 1942년부터는 실내를 더 넓힌 육각형 모양의 포탑을 제작하였는데 이 역시 생산 비용 절감과 기간 단축을 위해 대부분을 한번에 주조하고 해치와 같은 부속품들만 얍연 장갑판을 이용하여 용접하였다. 초기 T-34는 개발 당시의 개념을 이어받아 고무타이어로 된 휠을 장착하고 있었으나 전쟁이 지속되며 고무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자 전체를 강철로 만들고 대신 내부에 스프링을 단 휠로 대체되었다. 다만 전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변속기의 개선이 진행되어 5단 변속기를 개량하고 변속기와 엔진 사이에 추가로 클러치를 삽입하여 신뢰성을 높였다.
T-34는 다른 무엇보다 생산원가의 절감에 성공하였다. 1941년 생산 단가는 269,500 루블이었으나 이후 193,000 루블로 다시 135,000로 낮추어 초기에 비해 절반에 불과한 비용으로 전차를 제작할 수 있었다.
1943년 당시 T-34의 생산량은 월 평균 1,300대에 도달하여 3개 기갑 사단을 한 번에 무장시킬 수 있게 되었다. T-34는 1945년 말까지 57,300대 이상이 제작되었다. 이 가운데 76.2 mm 포를 장착한 1940–44년형은 34,780대, 그 이후 85 mm 포를 장착한 T-34-85는 22,609 대이다. 가장 많은 수량을 제작한 공장은 183호로 1941년부터 1945년까지 T-34와 T-34-85를 총 28,952대 생산했고 그 뒤를 고리키의 112호 공장이 이어 12,604대를 만들었다.
소련은 이렇게 생산한 막대한 물량의 T-34를 독소전쟁에 투입하였다. 전쟁 초기 소련의 기갑 병력에서 T-34가 차지하는 비율은 4%에 불과하였으나 종전 무렵에는 최소 55%를 차지하게 되었다.
종전 이후에도 T-34는 계속 생산되어 2,701대가 추가로 생산되었다. 소련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 라이선스 생산권을 주었고 1956년까지 폴란드가 1,380대, 체코슬로바키아가 3,185대의 T-34-85를 생산하엿다. 전체적으로 최대 84,070대의 T-34가 건조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 외에도 T-34 차대를 기반으로 한 자주포가 13,170문 제작되었다. T-34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전차였고, 후계 전차인 T-54/55 계열을 감안하면 역대 두 번째로 많이 생산된 전차이기도 했다.
T-34는 크게 두 개의 주요 생산 계열이 있었으며, 각각의 계열은 하위 파생형이 있었다. T-34의 파생형을 분류하는 것은 상당히 복잡할 수 있다. 포탑의 주조물, 표면의 세부사항, 그리고 탑재 장비는 생산한 공장마다 달랐으며, 새로운 특성들이 전차 생산 중에 추가되거나 구식 전차에 장착되었다. 파손된 전차들은 다시 제작되었으며, 새로운 모델의 장비나 새 포탑이 추가되기도 하였다.
붉은 군대는 T-34를 명명하는 것에 일관된 정책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1980년대부터는, 많은 학술자료에서 소련식 명명법을 사용하였고, "T-34"는 76.2 mm 주포를 탑재한 전차형, "T-34-85"은 85 mm 야포를 탑재한 전차형이었고,, 소수의 다른 모델은 "T-34 1940년형"과 같이 연도로 구별하였다. 몇몇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다른 명명법을 사용했는데, 첫 T-34 전차를 1940년형이 아닌 "T-34 1939년형"으로 언급했고, 원래의 포탑과 F-34 포를 탑재한 모든 T-34 전차들을 "1941년형"과 "1942년형"으로 나누는 대신, "1941년형"으로 통용해서 불렀다. 그리고 육각형 모양의 포탑을 장착한 T-34 전차들은 "1943년형"이 아닌 "1942년형"으로 불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군정보부는 T-34의 주요 생산 계열을 "T-34/76"과 "T-34/85"로 명명하고, 하위 파생형은 서양에서 통용되는 명명법인 알파벳으로 구별하였다. 독일군이 노획한 T-34를 사용할 때, "Panzerkampfwagen T-34(r)"로 명명했으며, 여기서 "r"은 "러시아"를 의미했다.

수많은 T-34와 T-34-85가 생산되었고, 소련은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전장에서 공격적으로 이들을 사용했으며, 전세계의 소련의 동맹국에 이들을 나누어주었다. 이 세 가지 요인 때문에, 수많은 T-34가 여전히 남아있다. T-34는 군사 박물관의 수집품이거나 전쟁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다수의 T-34는 개인이 소장하고 있으며, 비무장용으로 사용되는 전차들은 2만 달러에서 4만 달러로 팔리고 있다. 여전히 수많은 제3세계의 군에서는 후방 부대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곳에서는 영화 제작과 같은 민간용으로 사용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네레트바강 전투", "켈리의 영웅들"과 같은 수많은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티거 1의 희소성으로 인해 T-34-85 전차들은 티거 1처럼 수정되어서 등장했다. 시드니 폴락의 1969년 영화 "고성을 사수하라"에서는 거의 수정되지 않은 T-34-85 전차들이 독일군 전차로 사용되었다.
2000년에는, T-34 1943년형이 에스토니아의 수렁 밑에서 56년 만에 발견되었다. 전차는 독일군에 노획된 뒤 후퇴할 때 사용되었는데, 연료가 떨어지자 늪에 버리고 갔다. 수렁의 저산소 환경이 전차를 보존했고, 기름 누수나 녹, 그리고 다른 물로 인한 피해가 전차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엔진은 완전히 작동할 수 있도록 고쳐졌다.
다른 T-34의 보존사례에는 포트리에 있는 미국 육군 야포 훈련 및 유적 센터에 있는 1941년형과 프랑스의 무지 디 블랑데에 전시된 2대의 T-34 등이 있다. 무지 디 블랑데의 T-34 중 1대는 여전히 작동하며, 여름의 "카루셀" 전차 전시 때마다 전시품으로 등장한다. 만델라 웨이 T-34 전차는 런던 버먼지 근처의 거리명에서 이름을 딴 개인 소유의 T-34-85 전차로, 예술가들과 그라피스트들이 자주 다시 색칠하고 있다.



